발효의 보고(寶庫), 김치와 된장
한식의 정체성은 발효에 있다. 김치, 된장, 고추장 등 한국의 발효 식품들은 미생물과의 공생을 통해 원재료의 영양과 기능을 극대화하는 생명공학의 산물이다. 이들은 단순한 저장 기술을 넘어, 살아있는 유익균을 풍부하게 함유하여 장 건강을 지키고 면역력을 강화하는 데 탁월한 효능을 발휘한다.
김치 발효는 유산균(Lactic Acid Bacteria, LAB)에 의한 젖산 발효 과정이다. 발효 초기에는 류코노스톡(Leuconostoc) 속 유산균, 특히 류코노스톡 메센테로이데스(Leuconostoc mesenteroides)가 우점종으로 활동하며 시원하고 톡 쏘는 청량감을 부여한다. 발효가 진행되어 산성 환경이 되면 락토바실러스(Lactobacillus) 속, 특히 락토바실러스 플란타룸(Lactobacillus plantarum)이 새로운 우점종으로 자리 잡아 유해균 생육을 억제하고 보존성이 높아진다. 이처럼 김치는 발효 단계에 따라 주요 미생물 군집과 풍미가 달라지는, 살아있는 식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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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한국관광공사 포토코리아-김지호 |
적숙기 김치의 놀라운 효능
김치의 건강 기능성은 발효 단계에 따라 그 효과가 달라진다. 농업진흥청 연구에 따르면, 김치가 '맛있게 익었을 때', 즉 '적숙기(適熟期)'에 노화 방지 효과가 최고조에 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적숙기 김치 시료를 처리한 세포는 노화가 현저히 늦게 진행되었으며, 대장암 세포 성장 억제 효과 또한 갓 담근 김치나 과숙성된 김치보다 적숙기 김치에서 가장 높게 나타났다. 일반적으로 김치를 담근 후 8일에서 10일 사이에 유산균 수가 가장 많아지며, 이 시기가 바로 적숙기에 해당한다.
이는 김치의 건강 효능이 발효 과정이라는 시간 축 위에서 정점을 찍는 '피크 현상(peak phenomenon)'임을 시사하며, 단순히 재료의 효능을 넘어 발효 숙성 시점이 건강 기능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보여준다.
장내 미생물 생태계의 재편과 전신 건강
김치 섭취가 인체의 장내 미생물 생태계에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온다는 사실은 이미 수많은 연구들을 통해 입증되었다. 인체 적용 시험 결과, 김치를 섭취한 그룹은 장내 유익균인 락토바실러스와 류코노스톡 속 균주의 비율이 유의미하게 증가한 반면, 유해 효소의 활성은 감소했다. 이는 김치 유산균이 장내에 성공적으로 정착하여 유해균의 활동을 억제하는 '정장 작용'을 수행함을 보여준다.
특히 과민성 대장 증후군(IBS) 환자를 대상으로 한 임상 연구에서는 12주간 매일 210g 김치를 섭취한 그룹에서 혈중 염증성 사이토카인 농도와 대변 내 IBS 유발 유해 효소 활성이 감소했으며, 복통, 복부 팽만, 변비와 같은 주요 증상이 개선되는 효과를 보였다. 또한, 김치에서 분리된 특정 유산균주인 락토바실러스 플란타룸 K50을 섭취한 비만 성인의 경우, 장내 미생물 분포에 긍정적인 변화가 관찰되었다. 이는 김치 섭취가 단순히 유익균을 공급하는 것을 넘어, 기존의 장내 미생물 생태계 구성을 적극적으로 재편(reshaping)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김치, 자연 발생적 신바이오틱스 식품의 전형
김치는 프로바이오틱스(probiotics)와 그 먹이가 되는 프리바이오틱스(prebiotics)를 함께 공급하는 완벽한 형태의 '신바이오틱스(synbiotics)' 식품이라는 점에서 그 강력한 장내 환경 개선 능력이 기인한다. 김치에는 살아있는 유산균(프로바이오틱스)이 풍부하며, 주재료인 배추, 무, 마늘, 양파 등은 유익균의 성장과 활동을 촉진하는 비소화성 식이섬유, 즉 프리바이오틱스의 훌륭한 공급원이다.
연구에 따르면 프로바이오틱스와 프리바이오틱스가 풍부한 식품을 함께 섭취할 경우, 단독 섭취 시보다 장내 유익균 증식 효과가 최대 2.5배까지 높아질 수 있다. 김치는 그 자체로 이러한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하는 이상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셈이다.
건강한 장은 소화기계를 넘어 전신 건강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장내 미생물 생태계의 균형은 면역 체계 조절, 만성 염증 억제, 그리고 노화 지연과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세계김치연구소의 연구 결과들은 '장-피부 축(gut-skin axis)', '장-면역 축(gut-immune axis)', '장-관절 축(gut-joint axis)'의 존재를 명확히 보여준다. 예를 들어, 김치 유래 유산균인 락토바실러스 사케이 Wikim 30(Lactobacillus sakei WiKim 30)은 아토피 피부염 증상을 완화하고 혈중 IgE 생성을 감소시켰다. 또한, 갓김치에서 분리한 류코노스톡 시트리움 WiKim56 (Leuconostoc citreum WiKim56)은 류마티스 관절염 모델 쥐의 염증 반응을 억제하여 관절염 증상을 개선하는 효과를 보였다.
이러한 전신적 효능의 근간에는 발효 과정 자체가 원재료를 생화학적으로 변환시켜 새로운 기능성 물질을 생성하고 기존 영양소의 생체이용률을 높이는 '생물학적 강화(bio-enhancement)' 과정이 있다. 발효는 단순한 보존 기술이 아닌, 자연적인 생명공학 기술이다.
예를 들어, 콩을 된장으로 발효시키면 미생물이 단백질을 소화 흡수가 용이한 아미노산으로 분해하여 단백질 흡수율이 월등히 높아진다. 또한 항산화 물질인 멜라노이딘(melanoidin)이 생성되어 노화 억제 효과를 발휘한다. 김치 역시 발효를 거치면서 비타민 C 함량이 증가하며, 항암 효과가 더욱 증대된다.
최근 연구에서는 김치 발효 과정에서 페닐젖산(phenyllactic acid, PLA)이나 히카(2-hydroxyisocaproic acid, HICA)와 같은 항균 및 면역 조절 기능이 있는 새로운 대사산물이 생성된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이처럼 발효는 원재료가 가진 잠재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 건강 효능을 극대화하는 핵심적인 과정이다.
결론적으로, 김치와 된장 등 한식의 발효 식품들은 단순한 음식을 넘어 장 건강을 개선하고 면역력을 강화하며, 나아가 노화를 지연시키는 과학적 근거를 가진 강력한 기능성 식품이다. 이는 '저속노화 한식'이 단순한 트렌드를 넘어 전 세계인의 건강한 삶에 기여할 수 있는 핵심적인 이유가 된다.
다음 연재에서는 '자연이 선물한 밥상, 제철 나물과 오방색의 항산화 에너지'를 주제로, 우리 땅에서 나는 제철 채소와 나물의 숨겨진 효능, 그리고 오방색 식단이 현대 영양학적 관점에서 얼마나 우수한지 파헤쳐 볼 것이다. 많은 기대 바란다.